저서
귀가 어두운 어머니에게 시집을 읽어 드린다. 책 읽기를 즐기시는 어머니는 오른쪽 귀를 딸의 입 가까이 대고 옆구리를 바짝 기댄다. 좋아하실 만한 시를 골라 어머니 귀에 대고 큰소리로 낭독한다. ‘배추 농사지어 읍내 시장에 간다. 인건비 떼고 나니 땡전 한 푼 집에 가져갈 게 없다.’ 이 대목에서는 “참말로 농사일을 잘 아는 사람이네!” 목소리에 힘이 실린다. 어느 해 텃밭 농사지어서 감자 한 상자에 오천 원씩 받고 스무 상자를 헐값에 주고 왔노라고, 농부의 심정을 충분히 알고도 남는 듯해, 참 좋은 책이라고 칭찬한다.
나는 책을 덮고, 어머니가 즐겨 외는 아버지의 편지를 암송해달라고 짐짓 보채본다. 주름진 얼굴에 얼핏 엷은 홍조가 인다.
‘봄철 아지랑이 끼고 종달새 우는 봄이 왔습니다.
흘러가는 철도 한 단 더 높은 듯
우리 부부 후정 다정도 한층 더 두터워지는 듯
아리 삼삼한 얼굴 다정한 성음 차마 잊고 견딜 길 없어
공부를 둘째 두고 이런 사연 편지를 씁니다.
현처 원함과 같이 성공 길을 밟아갑니다.
안심하세요, 안심하세요.’
아버지의 연애편지를 외우는 어머니의 낭랑한 목소리는 열여섯 수줍은 새댁 모습을 떠올리게 한다.
신행 중 아버지와 주고받은 수백 통의 사연은 아흔을 바라보는 어머니의 기억 속에 살아있다.
-수필『어머니의 연서』중에서
작품해설
『어머니의 연서』는 등단작으로 ‘나의 삶 나의 수필’을 삶의 진솔한 고백이다. 수필의 소재는 가족사, 가정사를 주 소재 원으로 하고 있음으로 여성 수필의 모습을 여실히 보여준다. 사소한 삶의 발견이지만, ‘기록’을 통해 삶에 대한 재점검과 의미를 되새겨 보는 의식을 볼 수 있다.
인간은 누구나 자신의 삶이 특별, 화려, 우아, 찬란하길 바라지만 대부분의 일상은 평범하게 흘러감을 경험한다. ‘수필쓰기’는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면서, 인생의 발견과 깨달음을 얻어내는 일일 수 있다. ‘수필쓰기’가 중요한 것은 나의 삶과 인생의 ‘기록장치’이라는 것이다. ‘기록’을 통해 삶의 재발견과 스스로 삶에 대한 의미부여를 할 수 있음을 깨닫는 일이다.
작품 둘
기억의 창고에서 돌아가신 아버지의 제자를 만난다. 스승의 날이 지난 어느 날, 어머니는 신기한 일을 겪었다고 달뜬 표정을 지었다.
“참으로 희한한 거라, 웬 여자가 찾아와서 너희 아버지 사진 앞에서 대성통곡을 하는 거라.”
그녀는 아버지의 제자였다. 돌아가신 아버지를 뵙고 싶어 아버지의 고향을 물어물어 사십여 년 만에 찾아왔다.
소녀는 초등학교 때 가정형편이 너무 어려워 학교에 다닐 수 없었다. 마침 담임 선생님인 아버지의 도움으로 졸업을 하게 되었다. 사는 게 바빠 그때의 은공을 못 갚고 인제 와서 선생님을 찾아뵙게 되었다고. 사진을 보니 하나도 안 변했다고 울고 또 울었다. 사십여 년 세월이 흘렀지만, 스승의 언저리라도 느끼고 싶어 잊을 수 없어 찾아왔던 제자였다.
스승의 날이 돌아오면 액자 속 아버지를 떠올리며 빛처럼 왔다가 사라져 간 그녀를 생각하게 된다. 어린 여학생의 아름다운 마음이 하늘에 계신 스승에게 전해졌으리라.
오월, 반짝이는 기억들은 초록 물결이 되어 액자 속에서 팔랑인다.
-수필『액자 속 아버지』중에서
작품해설
수필『액자 속 아버지』2020년 5월 17일「경남일보」‘경일춘추’ 란 기고했던 작품이다
반짝이는 초록 물결 속에서 액자 속 아버지를 꺼내 본다. 오월은 가정의 달로 어린이날, 어버이날, 스승의 날이 두루 곁들어 있다. 가족들과 어울려 소박하고 정겨운 한때의 시간을 보내면서 지금은 곁에 없는 어머니, 어릴 적 돌아가신 아버지를 평생 그리워했던 어머니, 두 분을 회상하며 반짝이는 기억을 수필의 소재로 삼았다.
내가 글쓰기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한 때는 초등학교 3학년 때였다. 여름 방학 과제물로 일기 쓰기가 있었다. 공책 한 권을 다 채워서 숙제로 내었더니 담임 선생님께서 칭찬했다. 일기장은 다른 과제물과 함께 골마루에 펼쳐서 전시회를 했다. 그때 선생님의 칭찬은 푸르른 향기가 되었다. 고등학교 때 현진건의 ‘B 사감과 러브레터’읽고 독후감 대회에서 수상하여 받은 ‘여자의 일생/ 모파상’은 오래도록 기억의 창고에서 빛났다.
작품 셋
건물 입구를 들어서면 본관 1층 로비에는 부드러운 음악이 흘러나온다. 그림 전시관에는 작품 속 해바라기가 햇살을 받으며 환하게 반긴다. 잠시 유가족이라는 슬픔과 어두운 마음도 잊는다. 편안한 마음으로 치유가 되는 아늑한 공간은 먼저 세상을 떠난 가족들의 영혼과 정답게 포옹할 수 있으리라.
스물아홉에 백혈병으로 돌아가신 오라버니는 무덤이 없다. 당신의 뼛가루는 외진 화장터의 숲속 소나무 밑에 뿌려졌다. 어머니는 운명하는 날까지 한 줌 흙이라도 떠와서 오라버니의 무덤을 만들어 주고 싶어 했다. 사십여 년 세월과 함께 산세가 변하듯 오라버니의 흔적도 희미하다. 기일만이 매년 달력에 동그라미로 그려진다.
음력 시월이면 오라버니 제사가 돌아온다. 풀숲에 있는 선산은 벌 초 때 아니면 일 년에 한 번 찾아가기도 버겁다. 점점 장례문화도 변화하고 있다. 문화예술 공간이 함께 하는, 가족들이 밝은 마음으로 행복하게 찾아올 수 있는 공간으로 자리했으면 한다. 오라버니의 흔적을 찾아서 안식처가 되는 곳으로 모셔오면 어떨까, 선산에 계신 어머니가 기뻐하실까.
‘별의 정원’을 마주하면서 잠시 생각에 잠긴다.
-수필『별의 정원』중에서
작품해설
수필『별의 정원』 2020년 10.18 「경남일보」‘경일춘추’ 란 기고한 작품이다
작품에서 언급했듯 스물아홉에 돌아가신 오라버니는 무덤이 없다. 당신의 뼛가루는 외진 화장터의 숲속 소나무 밑에 뿌려졌다. 집안의 기둥이었던 오라버니의 죽음은 하늘이 무너지듯 가족에게는 엄청난 충격과 아픔으로 삶의 변화도 곤두박질쳤다. 자식을 잃은 어머니에게는 누구보다 더 큰 상처로 실의에 젖어 몇 년을 건성건성 지냈다. 그중 오빠의 무덤이 없는 것도 어머니에게는 큰 슬픔으로 남았다. 마음의 무게가 천근만근이 되어 가슴을 짓누를 땐 “이럴 땐 자식 모라도 찾아갔으면 하고 절규했던 모습은 내게도 슬픔으로 자리하곤 했다.
문학 기행 차 들리게 된 봉안당의 ‘별의 정원’은 카페와 함께 시와 음악과 그림이 있는 예술의 공간으로 아담하고 잘 정돈되어 깨끗했다. 무덤이 없는 오라버니를 떠올리며 어머니에게 보여 드리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무덤에 계신 어머니도 환하게 웃으리라.
유년 시절의 시골 고향은 문학의 배경이 되었다. 그 무렵, 문학소녀였던 작은언니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밭고랑에서 풀을 매며 세계 명작동화 이야기에 젖어 들었다. 입담이 좋은 언니는 시간 가는 줄 모르게 우리를 이야기 속으로 빠져들게 했다. 겹친 허리를 일으켜 세우노라면 사방에 어둠이 삽시간에 내려앉곤 했다.
머잖아 유년의 고향인 시골로 돌아가리라 꿈꾼다. 유년의 그리움을 함께하는 우리 자매들은 어머니의 숨결을 공유하리라.
수필『액자 속 아버지』2020년 5월 17일「경남일보」‘경일춘추’ 란 기고
: http://www.gn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444877
수필『별의 정원』 2020년 10.18 「경남일보」‘경일춘추’ 란 기고
: http://www.gn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4577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