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걷이가 끝나고 어느 한갓진 날 밤 도래멍석 같은 둥근달이 높다. 탱자나무 울타리가 촘촘한 앞집에는 홀어미가 산다. 삼이웃의 처녀들과 시집온 지 해소수도 지나지 않은 새악시 두엇이 모여 밤참으로 비빔밥을 해 먹는다. 낮에 오명가명 살펴봤기에 내풀로 우리 집 앞이라는 걸 내세워 단발머리인 나도 잔손불림에 거든다. 바람이 소소히 일어나고 굴뚝에서 하얀 연기가 지붕 위로 살랑살랑 피어오르네. 갓밝이면 뜨르르 소문나것다.
그늘도 지고 볕도 잘 드는 산비알의 고사리 줌줌이 꺾어 옹솥에 데쳐내고 도란도란 흐르는 물에 헹구어 참기름과 깨소금 간장으로 살살 무친다. 잘 드는 손칼로 삼박삼박 소풀 베어다 슬슬 끓는 물에 도르르 굴러내어 양념 아끼지 않고 무쳤능가. 왈랑왈랑 끓는 물에 익혀 맡아보고 돌아보고 무친 도라지나물. 요리조리 다듬은 질금나물은 오가리솥에 안쳐 비린내 가시고 나면 기름 치고 깨소금 뿌려 조물조물. 착착 썬 무채는 숨죽을 만큼 덖다가 어리실꿈 익혀내고. 콩나물은 까바지도록 데쳤네. 시금치는 비단 잎만 가리고 연분홍 뿌리도 다듬어 나긋나긋하고 사랑옵게 우다 놓고.
참바지락과 홍합을 다져 참기름에 볶다가 깍둑깍둑 무 썰어 넣고 물을 부어 한소끔 끓인다. 요모조모 반듯반듯 두부도 썰어 넣고 조선간장으로 삼삼하게 간을 맞춘 탕국 맛이 시원타.
―수필『꽃 밥』중에서
❀ 수필『꽃 밥』은 2020년 2월 24일「경남일보」‘경일춘추’ 란에 실렸던 작품이다. 아마 중학교 2학년 무렵이었지 싶다. 재종언니 집에 동네 처녀들이 모여 호롱불 켜놓고 십자수를 놓거나, 여름날 모깃불 피운 마당에 덕석을 펴놓고 삼을 삼을 때 그 틈새에 비집고 앉아 온갖 곁눈질을 다하였다. 그러면서 십자수 놓는 법도 배우고 내가 몰랐던 처녀들 이야기를 들으면서 삼도 삼았다. 뉘 집에서든 서넛만 모여도 밤참을 해 먹던 산골 마을의 달짝지근한 정을 불러내 깨고소하게 그리움을 담아냈다.
모르고 있었거나 잘 알지 못했던 것을 새롭게, 더 확실하게 알게 되는 재미가 ‘아는 맛’이다. 작가가 곁에서 이야기를 들려주는 듯한 느낌이 드는 것이 읽는 맛이다. 생활 속에 녹아있는 말, 마음을 끌어당기는 우리말이 맛나다.
수필 쓰기는 쓰레그물로 강바닥을 뒤져 사금을 건져내는 것만큼 힘든 작업이다. 작품에 순우리말을 앉히며 탄탄한 기둥을 세우고 글맛(작품성)과 손맛(사회성), 눈 맛(참신성)이 있도록 쓰려고 애를 쓴다.
끼니때가 되면 오가리솥 아궁이 앞에 웅크렸다. 아무 때라도 산에 올라 땔나무를 푸지게 묶어와 부엌 모퉁이에 쟁여 두었다. 사는 일도 그렇고 몸도 서툴렀다. 나무를 하다 보면 손가락을 슴벅 베이거나 다리 어딘가 찢기고 긁혀 돌아오는 길은 몹시 쓰라리거나 절뚝거렸다. 하루해가 저물고 별빛이 차갑게 보이면 군불을 지폈다. 어쩌다 옹이 박힌 나무를 아궁이 속에 던져 넣으면 활활 타오르며 뽀그르르 거품을 문다.
(……)
흙담 옆 턱이 허물어진 우물 속으로 팽팽하게 두레박을 내리다 거기, 하늘이 내려와 퍼지는 동심원에 젊은 날의 꿈을 비춰보려나. 하루에 한 뼘씩 늙어가는 것처럼 보이는데…. 총각은 오래도록 우물을 들여다본다. 돌 틈에 뿌리내린 물이끼가 짙푸르다.
삼십 년쯤 지났을 기라. 자운영 꽃이 흐드러지던 어느 날 달랑 보퉁이 하나를 든 여인이 치맛자락을 팔랑거리며 마당으로 들어섰다. 짙은 분 냄새가 났것다. 마침 나물거리를 헹구느라 물을 퍼 올리던 총각이 그만 두레박줄을 놓쳤다지. 비알 밭을 매고 내려오던 아낙네 두엇이 흙담 위로 기웃거리고.
참속을 알 수 없는 여인은 보퉁이를 던지듯 내려놓고 마루에 걸터앉더니만 다짜고짜로 저도 오갈 데 없으니 같이 살자고 했다던가. 어처구니없어 사느랗게 보고만 있던 총각낭개가 간짓대를 찾아 두레박을 건져 올린다. 퍼 올린 한 두레박 물을 들고 여인이 앉아 있는 마루 쪽으로 성큼성큼 가더니 보자기를 펼치듯 쫙 끼얹었다고 하더라.
―수필「나비물」중에서
❀ 수필『나비물』도 2020년 3월 9일「경남일보」‘경일춘추’ 란에 실렸던 작품이다. 어린 시절 마을에서 어른들이 ‘총각낭개’라고 부르는 나이든 총각의 삶을 들여다보았던 것을 떠올리며 썼다. 내가 그를 눈여겨본 것은 초등학교 4학년 무렵이었고 꺼칠꺼칠한 목소리에 머리가 희끗희끗한데 왜 ‘총각낭개’라고 부르는지 알 수가 없었다. 글품쟁이가 되면서 총각의 내력을 더 깊이 알아보려 했더니만 그 총각과 그를 알만한 어른들은 모두 돌아가셨다.
나는 마을 어른들의 틈 사이를 비집고 다니면서 내가 지닌 가장 따분했던 시간들을 지금도 붙잡고 산다. 몇 십 년의 시간이 흘렀어도 변하지 않는 것들이 어쩌면 내 삶을 이어갈 수 있는 힘이 되었는지도.
수필의 길은 서두른다거나 열정만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마음속에 오래 담아 묵혀 두어서 향과 맛을 낼 줄 알아야 하고. 바깥에서 들어온 앎인 지식만으론 감동을 주지 못한다. 자신의 체험으로 얻은 깨달음의 꽃이라야 감동을 준다는데. 무엇이든 마음에 담아 잘 익혀 내놓으려면 느긋이 기다릴 줄 알아야 하므로. 땅 속에서 굼벵이로 오랜 세월을 지내다 매미가 되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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