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상
저서
제 1시조집 ‘치자꽃 향기’에서 발췌 서벌(작고) 시인님의 작품 해설 중 일부
잴 수도 없는 물길 아득한 수심 깊이
진주알 찾아 헤듯 심중을 읽어가며
해조음 음계 더듬어 춤사위도 건져야 해
뒤엉킨 실타래 일랑 마주잡아 풀어야 해
그림자에 묻은 생각 횃불 잡아 길 밝히며
그렁한 울먹임마저 웃음으로 바꿔야 해
< 내조 > 전문
하찮은 것에도 쉽게 무너지고 마는 것을 내재된 울림으로 자신을 추스른다.
그러면서도 현실을 다짐한 의지만으로는 감당하기 쉽지 않으므로 아무리 벅차도 이겨낼 일이다. 지극히 개인적인 내조의 방식이지만 보편적이어야 한다는 암시를 던지는 작품이다. 그러므로 가정은 울먹임마저 웃음으로 바꿀 줄 알 때에야 온전히 지킬 수 있는 가족의 성이 된다고 주장한다. 현모양처를 지향하는 시인임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마른 풀 감귤조각을 성냥불로 지폈다
방안을 차오르는 향기로운 수직 연기
퇴행성 세포까지 헹궈 새로 되살리고 있다
남으로 창이 열리고 거기 빛, 바람 찬란해도
아니, 대형 TV속 춤사위 현란해도
무의식 차단된 세상 속으로 나도 가만 끌려간다
효자 보 고마운 이름 기저귈 자주 갈아도
옛 젊음 그리움인양 꽃 버섯* 한 점 돋으면
넘보는 창밖 햇살 앞에 부끄러운 이 한숨
* 꽃 버섯 : 욕창 상처를 비유함
< 간병기 > 전문
위 시는 병석의 시부모님을 지키는 며느리로서 자칫 시인의 아픈 현실을 상처로 헤집지나 않을까 매우 조심스럽다. 얼마나 힘든 고비였을지 시로서 환하다. 욕창을 꽃 버섯으로 삼았을지라도 햇살 앞에 정성이 부족함인가 여겨 부끄러워 할 줄 아는 시인이다. 시는 자기 삶의 냉정한 고백이어야 한다.
제 2시조집 ‘마음의 길을 따라서’에서 작품 발췌 (김정희 시조시인의 해설 따옴)
동해 끝 수평선 너머 오래 전 그가 살았네
개구쟁이 아기 천사 빛의 화관 둘러쓰고
빛고을 화려한 궁전 반짝 맛보기로 떠난 뒤
꽃단장 분단장 기다림을 시험하더니
잉걸불 타는 우듬지 가만히 쓰다듬으며
지상의 환호와 박수로 그가 둥실 내게 오네
<동해 일출> -전문
동해의 일출을 의인화하여 첫아기를 맞이한 환희와 감격 같은 정감으로 두고두고 읽히게 하는 작품이다. 희망의 속삭임 같은 여운과 울림을 준다. 그리고 ‘그가 둥실 내게 오네’ 와 같은 결구는 첫수 ‘ 동해 끝 수평선 너머 오래 전 그가 살았네’로 대비가 되는 가구(佳句)요 훌륭한 결말이다.
무심코 구른 돌에 산 그림자 울고 있다
좌표 잃은 포물선은 부초 곁에 부서지고
무채색 서양화 한 폭 허상으로 걸렸다
맑은 웃음 떠난 유역 깃발 든 바람 소리
참대 숲에 몸을 푸는 햇살 한 줌 빌려와서
청 태 낀 바위 기슭에 고운 신화 엮는다
아린 목젖 누르고 물빛처럼 살 일이다
순리의 종이 되어 나직이 흐르면서
너와 나 아픈 아우성 귀를 열고 듣자, 우리
<강가에서>- 전문
위는 제1시조집에 실렸던 작품인데 2시조집 해설을 해 주시며 덤으로 얹어 평설 붙여 주셨다. 첫 수에서 아름다운 진주 남강의 역사성을 상기하면서 이 땅이 무채색 서양화 한 폭으로 왜적에게 한 때 능욕 당했음을, 또한 그 역사가 한 순간의 허상이 아님을 강조하고 증언한다. 둘째 수에서는 그 역사도 고운 신화가 되었다는 생각을 하며 후손은 아린 목젖을 누르고 물빛처럼 살 일의 주문과 함께 과거 역사를 되새기며 아픈 아우성에 귀를 열고 듣자고 호소한다. 시인은 교단에서 역사의식과 호국 의지를 가르친 교사답게 작품으로 그 의지를 보인 점이 남다르다, 이 작품은 1991-1992년 한국문학 작품 선에 실렸다.
제 3시조집 ‘꽃불’에서 작품 발췌 및 평설
봄 – 아쉬움
희붐한 아침 안개 꿈도 채 깨지 않는
먼 기적 귀 밝히고 사방팔방 길을 묻던
신천지 빛나는 가능 기다릴 줄 알았네
여름- 성숙
반복된 실수와 도전 땡볕 소나기에
땀과 눈물 생채기로 달달하게 여문 과육
민들레 홀씨 터뜨려 꽃은 피고 또 지고
가을- 환승을 꿈꾸며
개울 건너 강을 건너 빛줄기 마주보며
차창에 어리는 풍경 꽃단풍 안락의 계절
겨울로 떠나는 열차 설원 지나 다시 봄, 봄
< 삼계 여행 > 전문
위의 시편은 인생을 계절에 비유하여 봄, 여름, 가을을 삼계(三季)로 구분, 계절마다 그 시기의 의미를 상징할 수 있는 소제를 붙였다. 봄의 미숙함과 깨지 않을 것 같은 꿈은 바로 빛나는 가능이 기다려줄 줄 알았다. 여름은 또 어떤가! 단 한 번으로 끝나지 않는 실수의 반복에 지치지 않는 도전과 응전, 그리하여 익어가는 과육과도 같은 성취의 날들은 흐드러진 잡초 속에서도 뭉치고 흩뿌려져 다시 피어나는 민들레 홀씨였다. 그리고 가을은 마침내 겨울이라는 황혼과 고독의 계절을 앞두게 된다. 꼭 가서 닿을 수밖에 없을지라도 그날은 기다리지도 않을 날이며 가능하면 외면하여 쫓고 싶은 바람이다. 보람과 안락의 결실을 향유하며 다시 환승 열차를 갈망한다. 순환과 순응 절대적 믿음이다,
다함도 끝남도 아닌 설움 기쁨 더욱 아닌
한 줄 조시(弔詩) 밑줄 그은 서녘 능선 붉은 허방
꼬리 긴 불새 한 무리 가물가물 넘는다
< 낙조 > 전문
위 단시조는 능선을 물들이는 일몰의 순간을 포착했다. 엷은 구름이 그리는 그림이자 시편이다. 말문이 막히고 심장이 멎을 듯, 그리고 후다닥 불새가 지나간 자리는 마침내 막막한 침묵 속에서 장엄한 풍경으로 뚝 멎는다. 진다는 것은 잿불처럼 생명의 화로 안에서 품어 기다리며 끝내 지펴내는 영속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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