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체전 다수
전체 86회 수상
마음의 일상 ㅡ 공간확장
익숙함을 벗어나 새로움을 시도할 때면 망설여지고 두려움이 앞선다.
그러나 미숙함을 곰삭여 낼 수 있는 용기를 가진 자만이 예술의 즐거움을 누릴 수 있다 생각한다.
이 작업은 익숙했던 일상적인 공간 속에서 희망과 새로움을 찾는 열정적인 나의 삶을 드러낸 것이기도 하다. 무념무상의 상태로 몰입한 후 색채의 질감 속에서 자유롭고 역동적인 몸짓으로 드러낸 곡선과 파편화된 점선, 그리고 기하학적인 형태는 나의 느낌을 표현한 것이다.
여백은 비움이며 새로움을 받아들이는 안식처이다. 무채색의 여백은 무념무상, 단조로움 그 자체가 명상처럼 다가온다. 반면에 색채의 여백은 두 번, 세 번 반복적으로 덧칠하는 과정에서 정신의 평온함을 얻게 된다. 그 후 여백 위에서 표현되는 기하형태와 선들은 다분히 의도적인 동시에 우연적이다. 그 선들을 통해서 명상과는 또 다른 카타르시스를 느낀다. 이 과정은 나의 희노애락을 삭여낸다. 나는 어느새 마음의 쾌적함과 해방감을 느낀다.
캔버스는 내 마음의 공간이다. 내 마음의 공간인 캔버스 속 두 개의 기하형태는 기쁨과 슬픔, 격정과 절제와 같은 상반된 두 마음을 드러낸다. 그리고 색채의 여백은 맑음과 텅 빈 자유로움이고 뻗쳐나가는 쾌적한 직선과 곡선은 몸짓의 자유로움이다. 결국 비우고 채움으로써 내 마음 속에서 자유로움에 이른다.
예술가는 어떠한 대상을 통하여 의미부여를 하고 싶은 욕구가 있다. 그렇기에 나의 의도를 담아 어떠한 행위를 시도하거나 작품을 제작하는 과정에서 직관과 심안을 만나 재구성하여 기존과의 차이를 완성시킬 때 무의미하던 것들이 생명력을 얻고 의미를 형성해나간다. 그것이 내가 생각하는 예술이다.
- 임봉재 작업노트 -
마음의 창
시각예술은 때때로 의미전달에 있어서, 전달하고자 하는 의미를 사람들이 제대로 인식하기에 조형적 가시성만으로는 한계가 있다.
색채는 인간마음의 정서이다!
검은 창으로 바라본 풍경은 검게 보이고 하얀 창으로 바라본 풍경은 하얗게 보인다.
사람들은 이렇게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이 자기중심적이다.
단색으로 포화된 캔버스 위에 역방향의 붓질로 변화를 주고 단조로운 기하학적 형태를 배치하여 절제 있는 명상적 화면을 드러내었다. 역방향의 변화된 색상은 같은 공간속에서도 사람들의 사고의 차이점, 직선은 힘氣과 곧음을 상징하며 원은 부드러움을 나타낸다. 이러한 것은 서로가 어울리지 못할 것 같지만 색상의 힘으로 조화를 이루게 하였다.
하나하나 개성을 존중하고 포용할 수 있는 삶을 추구하며 정신적 평온함을 마음의 안정을 찾아보고자 함이다. 편견 없는 시선으로 넓은 세상을 바라보고자 함이다.
- 임봉재 작업노트 -
도시 풍경
- 우연성에서 비롯된 운율적인 선과 색면의 하모니 -
작가는 작품을 완벽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어떤 것을 찾아내는 것이며 화폭에 그 정신을 녹여내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내가 행하고 있는 것이 과연 무엇인가 가끔 나의 작업에 대해 되돌아본다. 어떤 계획을 세워 작업을 이렇게 저렇게 진행해 나가다 어느 순간 내 의식은 매몰된채 그림이 나를 그려나간다.
그림을 그린다기보다 이성과 감성의 경계를 넘나들며 마음이 움직이는 대로 손이 가는 대로 긋고 뿌리고 닦아내고 두드린다. 이 같은 행위는 신명이 난다. 때론 유희 속에서 우연적 아름다움을 발견하고 희열을 느낀다.
이러한 작업을 위하여 정신의 스케치를 반복적으로 시도하다가 실행을 한다. 하지만 시행착오도 가끔 겪게 되고 또한 경험의 울타리에 의지하여 안주하다 보면 문득 나의 정신이 매몰되는 긴장감을 갖게 되고 그것을 극복해나갈 수 있는 의지와 사회를 향해 뭔가를 제시할 수 있는 사명감도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오늘날 우리는 반복되는 일상적인 삶 속에서 자아를 잃어가면서 살아가고 있다. 이러한 정신적 방황 속에서 정형화된 틀을 깨기 위해 고심하다가 나의 이번 작업에 있어서는“도시의 풍경”을 소재로 택해보았다. 채워도 채워지지 않는 네온 빛 현란한 도심의 환상과 욕망, 도심의 밤 풍경 이미지를 추상적으로 재구성하였으며 외형적 형태보다 그 대상 속에 내재되어 있는 그 무엇을 끌어내기 위한 작업이다.
기법으로는 캔버스 위에 선을 긋고 면을 메우는 것을 벗어나 판 위에 율동적이고 힘찬 선을 파서 입체적이고 촉각적인 선을 드러냈으며, 평면 공간의 한계를 넘어서 회화적 공간 확장으로 시도해 보았다. 이것을 바탕으로 감성을 시각화하기 위해 자유로운 몸짓과 손짓으로 드러난 운율적인 곡선과 직선, 선과 선사이의 작은 면을 오방색으로 메꾸어 균형과 악센트를 주고, 이들이 어우러져 교향악단의 아름다운 연주와 같은 색음을 느끼게 표현해보았다. 작품에 나타나는 색면과 자유분방한 선의 조화는 고독함 속에서도 생동감을 가져보고 시각적 감성을 느껴 자아를 회복하자는 의도이다.
조심스럽게 머뭇머뭇 이어지는 점선이 겸손함이라면 과감하게 뻗쳐나가는 직선의 대담함, 모나지 않고 유연하게 모든 것을 포용해줄 것 같은 곡선, 여유로움이 스며있는 색면! 각각 뚜럿한 개성도 있지만 한 공간 속에서 서로의 경계를 넘나들며 조화를 이루며 살아야하는 것이 우리의 삶이 아닌가?
나의 작업과정이 이성의 경계를 초월한 감성적이고 충동적이라 할지라도 이러한 행위는 기계적 삶의 속박으로부터 벗어나 정신의 자유로움을 찾고 그 속에 반영된 자아의 참모습을 찾기 위하여 앞으로도 행위적이고 우연적 작업은 끊임없이 이어나갈 것이다.
―임봉재 작업노트―
사유의 순환 - Cycle of thought
원은 점이며 점은 원형이다.
예로부터 태양은 인간들에게 경외의 대상이었다. 농경사회였던 시대상을 고려해보면 태양을 향한 숭배와 두려움은 그리 놀랍지 않다. 하지만 태양이 그토록 존경받고 신성시될 수 있었던 또 다른 이유가 있다. 바로 태양이 가진 ‘원’의 모양 때문이다. 무엇 하나 확실한 것이 없었고 정제된 것이 없던 시절, 완전무결한 원의 모양은 인간들에게 일종의 안도감과 안심을 심어주었다. 불안정하고 불확실성 속에서 찾은 유일한 안정감인 원은 인간에게 정신적 의지의 대상이 되었다. 그렇게 ‘원’의 존재는 인간의 집단 무의식 속에 스며들었다.
그리고 안정감과 더불어 ‘순환성’을 원에서 발견할 수 있었다. 원에는 시작과 끝의 구분이 없다. 출발점이 어디인지, 그렇다고 도착점이 어디인지 알 수가 없다. 시작과 끝의 구분이 없다는 것은 곧 시작과 끝이 같다고도 볼 수 있다.
철학자 노자는 이러한 원의 ‘순환성’을 수레바퀴에 빗대어 ‘원’과 원이 가진 ‘순환성’의 의미를 설명했다. 둥근 모양의 수레바퀴에는 고정된 차축이 있고 차축을 따라 바퀴테까지 연결된 바퀴살이 있다. 원형의 바퀴가 굴리면 차축을 중심으로 끊임없이 순환하는 바퀴살의 운동이 눈에 들어온다. 이 규칙적인 바퀴살의 순환적 운동을 노자는 원이 만들어낸 삶의 ‘진리’라고 말했다. 원형의 수레가 한 바퀴 도는 순간, 바퀴의 위치는 앞을 향해 한 발짝 내딛었지만 동시에 바퀴의 모양은 처음 그대로 돌아오는 것이 마치 변화를 토해내는 한편으로 불변의 모습을 유지하는 인간의 삶과 닮았기 때문이다.
미술에서도 원을 바라보는 이미지는 크게 다르지 않았다. 직선이나 곡선을 무심히 흩뿌리거나 휘갈기는 것은 종종 혼돈과 우연성을 나타내왔다. 그에 반해 원의 이미지를 이용할 때는 질서와 필연성, 그리고 순환성을 상징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렇듯 우리들은 오래 전부터 직선과 곡선이 난무하는 혼돈의 세상에서 살아남고 안정감을 찾기 위해 질서와 순환이 우리를 감싸주는 ‘원’의 세계를 지향해왔는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어쩌면 시간의 흐름에 맞춰 매 순간 변화하는 존재인 동시에 순환의 고리 속에서 돌고 돌며 영원히 불변하는 존재임에 우리는 원형의 운명을 타고났는지도 모른다.
이러한 우주공간속의 원형들도 태양과 지구를 중심으로 회전하지만 또 한편 태양은 나를 중심으로 순환한다. 그리고 나는 나를 은유하면서 새로운 세계를 찾아내고 공간과 시간을 넓혀간다
임봉재 작업노트
도심 속 언어를 꿈꾸다!
밤거리를 걷다 문득 궁금해졌다. 밤거리를 둘러싼 각종 네온사인과 거리를 메운 다양한 사람들, 그 속에 흐르듯 섞여있는 나. 논리와 단계를 밟으며 도착한 질문이 아닌 내 안의 직관이 무심히 툭하고 뱉어낸 듯 했다. 포착된 그 밤거리를 이루는 요소들과 그 요소간의 상호 관계, 그리고 밤의 어둠에 가려 보이지 않는 이면이 궁금해졌다.
인상파 화가 고갱은 질서와 규율을 초월한 인간의 원초적인 본능과 야만성을 표현하고 싶어 문명의 접촉이 일절 없었던 타히티 섬으로 떠나 그의 예술혼을 불태웠다. 그에 반해 나는 오히려 가장 현대적이고 문명이 집중된 도심 한 가운데로 들어가기로 했다.
나비의 날개짓에도 이유가 존재한다는 말이 있다. 그러면 내가 걸었던 그 거리 속의 수많은 인파, 수많은 불빛, 수많은 소리에는 얼마나 많은 이유가 존재하고 얼마나 많은 의미가 내포되어 있으며 또 얼마나 많은 언어가 오고가는 것일까? 이렇듯 잡을 수도, 헤아릴 수도 없는 밤거리를 화폭에 고스란히 담아보았다.
그리고 미처 담지 못한, 어쩌면 영원히 담지 못할 무궁무진한 도심 속의 언어들을 난 여전히 꿈꾸고 있다.
-임봉재 작업노트-
누구도 가보지 않은 곳
누구의 눈과도 마주치지 않은 곳을 찾아
난 오늘도 마음의 문을 열고
새로운 길을 찾아 떠난다.
예술이란
일상적인 경험을 기억으로 기억을 추억으로 추억을 마음의 느낌으로 재구성하여 자기만의 형식으로 드러내는 것이 예술이라 생각한다.
잠재되어 있는 어떤 경험이 생각만 한다고 해서 나타나는 게 아니다.
그것은 타자에 의해서 또는 다양한 체험으로 불쑥 솟아올라 지난날의 사건을 떠올려 그것을 시각화하기도 한다.
때론 ..
일상적 공간에서 !!!
청각적 자극이나, 시각적 자극에 영감을 받아 작업의 계획을 세워 정신의 스케치를 반복하다 작업을 실행에 옮겨 나간다 . 그러다 어느 순간 내 의식은 매몰된 채 그림이 나를 이끌고 나간다.이 작품의 모티브는 음의 여백, 리듬, 흥의 음율이다. 정중동의 경계에서 멈춤과 탈속의 멋을 즐기다.
ㅡ임봉재 작업노트중에서ㅡ
하모니로 수렴되는 자유의 힘. 화가 임봉재의 작품
김남시 (연세대학교 인문학연구원, 미학, 철학박사)
작가의 손은 자유롭게 캔버스 위를 움직여 다녔다. 휙 하고 캔버스를 가로로 내질러 지나갔던 그의 손은 어떤 때는 아래를 향해 뻗거나 흘러내리며 캔버스를 휘감아 돌았다. 망설이듯 캔버스 한쪽 부분에서 잠시 모습을 드러냈다 퇴장한 손과 캔버스 전체를 휘저어 다녔던 손의 흔적도 보인다. 놀라운 것은 화가의 손이 지나다니며 자유롭게 남긴 이 선들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느 것 하나 거칠거나 지나치다는 느낌을 주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그의 선들은
힘있고 자유분방하지만 넘치지 않는다. 그의 선들엔 조화로운 질서가 있지만 자로 잰 듯 규격화되어 있지 않다. 임봉재의 선들은 힘있는 자유로움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생겨나는 조화로움의 결합으로 인해 예사롭지 않다. 그의 작품이 주는 긴장감은 자유롭게 뻗어나가려는 힘이 그를 과하지 않게 하는 조화에의 힘과 결합되어 있다는 데에서 나온다. 그러한 선들이 교차됨으로써 생겨난 의도적이지 않은 작은 평면들을 작가는 붉음, 파랑 혹은 노란 색들로
메꾸어 넣었다. 화가 자신에 의해 재발견되어 채색된 이 작은 평면들이 그림 전체에 생기와 악센트를 준다.
이렇게 창작된 작품에 기초한 것으로 보이는 다른 일련의 작품들도 있다. 그건 위의 방식대로 그려진 캔버스의 4분의 3정도를 검은색으로 “가리거나 덮음”으로써 만들어진다. 흰 캔버스 위의 선과 색들은 그 검은 바탕에 대비되어 스스로 빛을 발하는 듯하다. 작가가 의도했건 아니건 그렇게 만들어진 작품들은 그래서 스테인드글라스 같은 인상을 준다. 스테인드글라스 위에 그려진 형체와 색들은 창 바깥으로부터 다가오는 빛의 투과성을 거르고 가로막음으로써 더 돋보이고 화려해진다. 그것들은 그렇지 않았다면 우리의 눈을 찌르고 부시게 할 자유분방한 빛들을 신비롭고, 종교적이며 관조적인 분위기를 만들어 내는 온화한 조력자로 변신시킨다. 자유롭게 뻗어나가려는 힘을 그를 넘치지 않게 하는 힘과 절묘하게 결합시키는 임봉재 작품의 미학적 원리가 스테인드글라스를 닮은 이 작품들에서도 작용하는 것이다.…(중략)…
그 두 힘 사이의 팽팽한 긴장감은 리드미컬한 율동감을 갖는 멋진 선들로 수렴되고 있기에.
시선으로 읽어나간 마음의 단상
글 임배순
자본주의. 무엇을 위해 존재하며 무엇으로 표현될 수 있을까? 누군가의 입장에서는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움직이는 합리적 체계, 누군가의 입장에서는 불평등과 착취를 유발하는 비합리적 체계, 또 누군가에게는 ‘편법을 부추기는 복잡한 규제’ 등 다양한 경제학적 혹은 사회학적인 시선으로 정의가 되어왔다.
그렇다면 예술가에게 비춰지는 자본주의는 어떤 모습을 띄고 있을까? 한 화가가 자본주의라는 거대한 이데올로기를 야경 속에서 포착했다고 한다. 그리고 그 포착하는 순간에 느껴지는 불안함을 일반적인 캔버스가 아닌 판넬을 이용해 기존과는 또 다른 방식으로 표현을 시도해보았단다. 그 작품이 바로 'City Scape'이다. 작품의 의도를 미리 알았기 때문이었을까? 작품의 전체적인 구도가 곧 바로 수긍이 되었다. 가장 처음 눈에 들어온 것은 비록 깊은 밤이지만 각종 간판, 네온사인, 가로등 불빛 등으로 잠들지 않는 도시를 검은색이 아닌 노란색 빨강색 등 원색계열로 표현된 배경이었다. 형광등 빛을 반사하는 노란색의 판넬은 정말로 밝다 못해 눈부신 야경처럼 눈을 찌르는 느낌을 받았다. 그리고 이 잠들지 않는 도심 속 여전히 살아 숨 쉬는 도시인들의 환상과 욕망의 어우러짐을 표현한 듯 판넬 위는 수 백개의 직선들이 교차하고 있었다. 단순히 판넬 위를 가로지르는 직선이 아니었다. 판넬 위 그려진 직선이 아닌 손수 파서 만들어낸 깊게 패인 홈의 연장선들이었다. 이렇게 파이고 교차되는 직선들에서 자본주의의 근간이라고 할 수 있는 불가피한 ‘경쟁’이 떠오르고 그 경쟁의 이면에 현대인들이 받았을 상처가 깊게 패인 직선으로 표현된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종횡의 열을 맞춰 이룬 듯한 직선들 사이사이 간간이 보이는 사선으로 뻗쳐나가는 몇 개의 직선들에게서 욕망의 어긋남 또는 일탈을 꿈꾸는 현대인이 보이면서 조금 전의 느낌에 또 한번 확신이 들었다. 그러나 작가는 현대사회의 혼잡함과 상처만을 보여주진 않았다. 직선들로 인해 만들어진 셀 수 없이 많은 아주 자그마한 사각형들은 다양성을 상징하는 듯 했다. 종전의 사회, 즉 자본주의가 도입되기 이전의 사회에서는 경쟁보다는 협력이 주된 사회였다. 하나가 되어 ‘생존’ 자체가 그들의 목적이었다. 허나 산업혁명 등을 거치며 기본적인 의식주가 해결되면서 실존적인 영역보다 그들을 표현해주는 본질적인 영역이 부각되어왔다. 여기에 자본주의 체제가 맞물려 경쟁사회의 시대가 도래하게 된 것이다. 이 경쟁이 수많은 병폐를 낳은 것도 사실이지만 또한 수많은 자기표현욕구가 비롯되어 현재의 다양성을 만들어주었다. 이것이 작가가 직선을 통해 생성된 다양한 모습의 사각형으로 전달하려하던 것이었나 싶다. 또 하나 그 다양성들 사이에서 우리는 희망을 발견할 수 있다. 하나만 바라보는 고정관념에 얽매어있지 않고 다양한 관점을 통합해 새로운 발전으로 이어지는 혁신, 결국 다양성에서 나온다. 이 수많은 사각형들 중 몇몇의 사각형들에 초록색, 흰색, 파랑색 등이 칠해져 있는 모습은 앞서 말한 혁신에 대한 희망, 경쟁사회의 부정적 요소가 아닌 긍정적 요소를 말하고 있는 듯하다.
마지막으로 작품을 이루는 주된 요소인 직선들에서 다가오는 총체적인 느낌을 말하고 끝을 맺어야겠다. 직선들을 가만히 응시해보니 우연성에서 비롯되었다고 하기엔 다소 절제된 느낌이고, 하나하나 절차에 맞게 만들어냈다고 하기엔 꽤 자연스러웠다. 이처럼 보는 이에게 극단이 아닌 중용의 느낌을 받게 해 준다는 것, 이성과 감성의 경계를 넘나들되 어느 한 쪽으로 치우치지 않으려 노력한 작가의 흔적 혹은 어지러운 현대사회 속에서도 이리저리 휩쓸리지 않으며 자신만의 중심을 지키자며 외치는 작가의 희망적 메시지가 아니었을까?
BLAK HOLE
일상적인 것의 변용
인간은 늘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지는 존재이다. 생존에 직결된 본질적인 질문이든, 자신의 존재 자체에 의문을 가지는 실존적인 질문이든 끊임없이 답을 구하려고 한다. 나는 예술이 던지는 질문을 받아들이고 이러한 나의 반응은 나에겐 초월적인 미의 가치를 만들어내는 기회가 된다.
기존과는 다른 통찰이 담긴 작품을 세상에 내놓는다면 작품을 접한 사람들은 새로운 미적체험으로 감성의 향기를 꽃피울 것이다. 나의 내면화한 생각과 느낌은 예술이 제시한 시선의 맥락 속에서는 상호연관이 되어있지만 각기 독립적이며 개체적이다. 이렇게 일상적인 것의 변용에서 수많은 사유들이 파생되며, 파생된 사유들이 또 다시 새로운 변화를 시도하는 시발점이 되어준다. 이 변화의 시발점을 기민하게 통찰하는 것이 현대사회에서 예술가의 소명이 아닌가 싶다.
사이버 스페이스에서 정제되지 않은 순기능과 역기능적인 수많은 정보들이 밀려오는 이 시대에 이것을 무절제하게 다 받아들여지고 있는 현실의 유혹을 표현한 BLAK HOLE을 공감해보고자 한다.
Contemporary artist 임봉재 작업노트
현대인의 思唯 ㅡ 욕망
인간의 삶은 경험적 일들을 떠나서는 이야기의 맹아가 되어질 수 없다
이러한 경험들은 시공간에서 있는 일들이다.
작가는 창작에 있어서 그 대상이 유한한 것이든 무한한 것이든 관계없이 이야기의 대상들에 대한 작가의 직관과 내면적 느낌을 표현한다.
현대사회에서는 상대와의 경쟁, 그리고 자신의 이성과 감성의 대립, 그 속에서 멈출 줄 모르는 욕구로 끊임없이 나아가고자 한다.
채워도 채워도 채워지지 않는 현대인의 욕망, 이러한 명예와 물질은 흐르는 강물처럼 잠시 우리 곁을 스쳐갈 뿐이다,
주제의 모티브로는 일상적 사물인 의자를 은유적이며 조형적 방법으로 표현하였다. 사다리의 계단처럼 높은 의자의 등받이는 지위의 상징이며, 보일듯 말듯한 흰색의 의자는 공허감을 표현한 것이다.
임봉재 작업노트
임봉재의 회화
회화는 바탕을 다지는 데에서 시작한다. 그것은 마치 집을 지을 때 땅을 파고 주춧돌을 놓을 때처럼 작업의 기초를 이룬다. 집이 이루어지는 입체적인 구조와는 달리 회화는 겉으로 보기에는 단순한 평면에 그칠지 모르나, 엄밀히 말해서 그것은 평면 위에 그려진다. 누적된 물감의 흔적이나 삼차원의 세계를 평면 위에 가시화한 착시조형의 결과이기 이전에, 작가의 의도에서부터 밑그림을 거쳐 완성된 작품에 이르는 그 전체과정은 공간적이면서도 동시에 시간적인 깊이를 가지고 있다. 때로는 애초의 의도와는 달리 수정이 불가피할 수도 있고, 극단적으로는 근본적으로 시도를 포기해야할 때도 있다.회화적 평면이 내포하는 그 허구의 세계 속에는 꿈과 희망에 못지 않게 그만큼이나 절망과 좌절이 있다. 실패나 성공의 여부마저도 다분히 주관적이며 허구적이다. 그것은 마치 미완성의 인생이 완성의 허구를 꿈꾸는 것과 같다.
임봉재의 회화는 바로 그 완성과 미완성 사이에 존재하는 회화적 허구의 존재가치와 그 의미를 묻는다. 무엇이라고 확실히 말할 수 없는 어려운 물음에 부닥쳐 이렇게 또는 저렇게 해답의 실마리를 찾아가는 과정, 빛과 어둠이 공존하듯이 존재의 양면성과 이중성이 실체의 경계를 무너뜨리고 있는 그 중간지대에서 그의 행적은 때때로 매우 애매모호하거나 우유부단해 보인다. 그러나 그는 인생이 그러하듯 예술 또한 그러한 것이라고 믿고 있다. 나타날듯하다가 사라지는 색채의 흔적이나 점선으로 머뭇거리는 형태들의 흔적, 때로는 과감하게 목소리를 높여보다가 순식간에 그 소리의 흔적들을 지워버리고는 난처해하면서 깊은 생각에 빠진 모습... 부정도 긍정도 할 수 없는 실패와 허구의 갈림길에서 그는 회화를 통해서 우리는 과연 무엇을 할 수 있는 지를 묻고 있다.
임봉재의 ‘사유(思惟)’시리즈는 결과 이전의 과정, 존재 이전의 생성과 형성과정을 깊숙하게 바라보는 작가의 생각을 보여준다, 결과에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과정의 성실성이다. 존재의 껍질을 깨뜨리고 다시 한번 그 알맹이를 들여다보는 일, 비록 완벽하거나 아름답지 않을지는 몰라도 그 미완성의 가능성 속에서 삶의 진실을 찾아보는 일. 그의 ‘사유’시리즈는 실체와 허구, 완성과 미완성 사이에 존재하는 인간 삶의 의미를 회화를 통해서 가다듬어본 그의 생각의 흔적들이다.
2005. 4. 13
김 임 수
(계명대 미대교수, 미학, 철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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