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진주에 와서 첫 인연을 맺은 분이 고 박노정 시인이다. 젊은 시절 사찰에서 반승반속인 처사와 시민운동가로 활동하며 진주성 논개 영정이 일본 화풍을 닮았다 하여 낫으로 ‘버허’ 하셨던 결기 있던 멋쟁이 시인이다.
평소엔 점잖으신 분이 어떻게 그런 강단으로 본때를 보여 주셨을까 늘 존경했던 어른이다. 아마도 오랫동안 ‘떠돌이 백수건달’로 생활하며 더 이상 잃어버릴 것도 없으니 그런 배짱이 나오지 않았나 싶다.
내가 진주 태생은 아니지만 젊은 시절 오랫동안 진주에서 살며 글을 써 왔기에 이젠 진주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다만, 진주 바깥에서 글쟁이 활동을 해 왔기에 진주 문인은 아니라고 해야 옳은 표현일 것이다.
‘떠돌이 백수건달’ 박노정 시인처럼 나도 젊은 날 참 많이도 돌아다녔다. 제자리도 못 찾고 유빙처럼 빙빙 겉도는 삶을 삼십년 넘게 하다 보니 이젠 ‘임자가 따로 있나 앉으면 그만이지’ 하는 것처럼 어지간히 뻔뻔스러움과 배짱이 늘었다.
글맛이 좋고 안 좋고를 떠나 내 글의 팔 할은 그분 덕분이다. 내 젊은 날 그분의 작품을 많이 읽었고 흉내를 많이 내려고 했기 때문이다.
그 어른 살아 계실 때 작품을 보여드렸더니 ‘힘이 넘치고 살아있네’ 하시던 말씀이 오래 남는다. ‘내가 뭐 유명 시인도 아니고, 넘 흉내 내지 말고 자네 글을 써라’ 던 말씀도 오래 남는다.
그 뒤부터 내 글을 쓰기 시작해도 자꾸만 그분의 스타일이 생각나 고치는데 애를 먹었던 일이 많았다. 내 삶도 떠도는 시간이 많아서 그런 건지 모르겠다.
‘떠돌이 백수건달’ 시인을 흉내 내다가 진짜로 깡패 같은 격오지 산청에까지 밀려 올라가버렸다. 어느 날 문득 내 모습을 보니 영락없는 멧돼지였다. 척박한 산골에서 지내다 보니 그럴 수밖에 없다.
오래전 시민단체와 정치단체 활동은 중단한 지 꽤 지났지만, 지금도 여전히 바깥 활동을 하는지 의심의 시선을 거두지 못하는 회사와의 갈등에서 선택한 것이 문학이었다. 하지만 문학 활동하는 것조차 못마땅하게 여겨 그 어른 세상을 떠날 때 장례식에서 향불 하나 못 올린 회한이 지금껏 남는다.
분명히 밝히는 것은 지금껏 글이 떠오를 때마다 화장실에서 볼일을 보며 화장지에 깨알같이 써서 메모를 남기고, 퇴근 후 집에서 작품 정리를 해오고 있었다. 사천 본사에서 밀고 올라간 산청 골짜기 공장에서 몽당연필 같은 팔봉인지 필봉산인지를 바라보고 차 한 잔 마시며 쓴다.
와이고 어금니가 으드득 깨물어지는 어느 날 천둥처럼 쩡 하는 바람소리에 옥상엔 칼날 같은 송곳니가 거꾸로 섰고 아금박 지게 살아야 할 일터에서 종종걸음이 더 추운 아침이었다. 새봄이 오면 지난번 무지개가 다시 뜰것가 생각게 하는 징한 산청의 겨울이었다.
― <머리말>
사계를 따라 지방별로 만났다 헤어진 시인들이 참 많았다. 멀리 떨어져 있어도 작품을 통해 교류를 했던 분들도 많다. 나름대로 작품세계가 뚜렷했고 세상을 보는 시선들이 달랐지만, 공통적인 건 시인들은 예민하고 예리하다는 것이었다. 눈에 보이는 부분과 감춰져 보이지 않은 부분까지도, 세밀하게 관찰하고 내밀한 감성으로 엮어낼 수 있는 재능이 풍부한 사람들이다.
세상에는 참으로 많은 문인들이 있고 문학평론가들도 많다. 그러나 시인들의 작품을 읽고 해설을 하고 평을 할 수 있는 사람도, 시인들이어야 한다는 생각이다. 시인의 감성은 시인만이 알 수 있는 것이다. 문학과 창작을 전공한 사람들도 시 해설과 평을 할 수 있지만, 너무 교과서적인 이야기들로만 채워진다면, 작품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것이 된다.
시평은 시를 이렇게 써야한다 저렇게 써야한다는 말보다, 시인이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인지 또 무엇을 바라는지를,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어야만 한다. 이 사람이 어떻게 내 마음속을 들여다본 것처럼 이렇게 잘 알까 하고, 느낄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괴테가 말했다. “좋은 시란 어린이에게는 노래가 되고, 청년에게는 철학이 되고 노인에게는 인생이 되는 시다”
시를 처음 시작하는 분이나 중견시인들도, 시를 너무 어렵게 창작하는 경향이 있다. 좋은 시는 너무 폼을 잡고 어려운 용어를 쓰거나, 과도한 문장 기교를 부릴 필요가 없이, 누구나 쉽게 이해하고 감동을 받을 수 있다면, 그게 좋은 시라 할 수 있다.
다만, 너무 평이하게 쓰는 것보다 비유를 들어, 살짝 읽는 이로 하여금 해석의 여지를 남겨주는 것도 하나의 재미라고 할 수 있다. 시를 쓰다 보면 갑자기 탁, 막힐 때가 있다. 더 이상 한 줄도 나가지 못할 때는 억지로 쓰려고 하지 말고, 주저 없이 펜을 놓는 것이 좋다.
시에 다가가는 감성적인 방법 중 하나는 예술세계로 빠져보는 것이다. 주종은 관계없다. 소주나 맥주, 양주 또는 와인 한잔에 취해보는 것도 좋은 방법일 수 있다. 그리고 좋아하는 가수들의 노래나 클래식 음악을 들으면서, 그 세계로 빠져보는 것이다.
일종의 자아도취일 수도 있는데, 예술은 어쨌거나 자아도취라고 할 수도 있는 세계다. 다른 예술인들의 장르에 함께 빠져들어 감성적인 감흥을 느껴볼 때, 갑자기 그 어떤 강한 영감이 떠오를 때가 있다.
그 순간, 시가 줄줄 나오면서 이 시가 과연 내 작품일까 스스로 감탄할 때가 있다.
인간은 누구나 그리움의 원천이 있다. 그리움은 자신에게 행복을 주었던 원천이다. 그리움의 대상은 바로 마음의 본향인 것이다. 그 마음의 본향을 잃어버린 사람들이 상실감에서 벗어나기 위해, 순례의 길을 떠나는 행위 자체가 갈증인 것이다.
문학 또는 다른 장르의 예술도 모두, 그 허기와 갈증에서 출발해 작품의 완성도를 높이는 과정에서, 정신적 풍요로움을 얻을 수 있게 된다.
셰익스피어는 자신의 마지막 작품 「태풍」에서, 반역과 복수의 역사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인간사회에, 용서와 화해의 창을 마련했다. 작가는 자연풍경 스케치도 중요하겠지만, 사회현상에 대한 사실적 진단과 미래예측까지도 갖출 수 있다면, 금상첨화라고 할 수 있다.
사회의 현상을 관찰해서 고발하고 비판하는 것에 머문다면, 창조라고 할 수 없는 단계에 머물게 된다. 긍정적 에너지로 승화해 내려면, 대안 제시 혹은 미래예측까지도 나올 수 있어야, 사회현상을 바라보는 적대적 관계에서 서로 용서하고 화해하는 단계로 나갈 수 있게 된다.
시인은 철학자이면서 동시에 교육자며 군인, 경찰관의 눈으로 또는 정치가, 경영자의 세계관으로 세상을 바라보며 관찰할 수 있어야 한다. 창작의 순간에선, 작가가 곧 세상 만물을 주관하는 신적 존재가 될 수 있어야, 진정한 예술의 세계로 들어갈 수 있게 된다. 바벨탑을 수십 채 짓고 허물며 다시 또 쌓아 올리며, 하룻밤에 만리장성도 지을 수 있어야만, 예술의 세계를 느낄 수 있게 된다.
정작 시인의 작품을 해설하면서, 잘못 이해하고 전혀 엉뚱한 방향으로 해석한다면, 그것은 심대한 오류에 해당된다. 물론 시를 읽는 것은 독자이니만큼, 독자들이 나름대로 주관적인 해석을 할 수 있는 것도 자유다. 세상에 내놓은 작품은 그렇게 저렇게 읽히고 마음대로 해석하더라도 어쩔 도리가 없다. 그것은 그들만의 몫으로 돌려주어야 한다.
시는 눈에 보이는 것 말고도, 보이지 않는 부분까지 잡아내어 노래하는 것이니만큼, 작품을 읽는 동안은 시인과 함께 마음을 같이 할 수 있어야 한다. 때론 아내의 마음으로 때론 남편의 마음으로, 때론 어른과 아이로 돌아가서 함께 울고 웃을 수 있어야 한다.
정말 읽기 힘든 작품도 있다. 시인이 너무 힘든 상태에서 아프게 만든 시들은, 독자의 마음도 아프게 하기 때문이다. 힘이 넘치는 작품도 있다. 잘 빚은 술처럼 맛있는 작품도 있다. 같이 맛있게 먹기도 하고 기분 나쁘면 욕도 함께 하고, 즐거울 때는 같이 박수도 칠 수 있는 마음으로, 즐겁게 여러 작품들을 조금씩 뜯어보았다.
너무 동떨어진 오류로 엉뚱한 해설을 달아 놓았으면, 시인의 용서를 구하는 마음으로 감히 평론집을 엮으면서 문학의 바구니를 정리해본다.
이 평론 해설집에 실린 작품들은, 필자가 계간 詩와늪 주간 및 심사위원으로 활동하면서 써 놓았던 이달의 작가상, 추천작가, 詩와늪 문학상 심사평을 다시 정리한 내용이다. 이미 각 시인들의 동의를 구하고 시상을 한 작품들이다. 당시를 회고하면서 그분들에게 다시 한번 축하를 보내며, 보다 더 건필하길 기원하는 바이다.
― <서문>
한 번도 가보지 않은 피렌체와 두오모 광장도 사진이나 영상 또는 ‘쓰지 히토나리’와 ‘에쿠니 가오리’의 〈냉정과 열정 사이〉 소설을 읽으며, 남자 주인공 쥰세이와 여자 주인공 아오이의 가슴 절절한 사랑의 감정이나, 상반된 입장차이 같은 것을 간접경험으로, 그 상황이나 분위기를 느껴보는 것도 좋은 문학적 체험일 수 있다.
삶은 끝없는 바다의 항해와도 같고 고독한 자신과의 지난한 대화의 연속일 수 있다. 세상과의 전투에서도 영적인 전투를 계속할 수밖에 없는 게 인간사인데, 여기에 철학과 문학의 바다에 풍덩 뛰어들어 보면, 세상은 참으로 풍요롭고 넉넉하다는 것을 체험할 수 있다.
1987년부터 시와 수필을 써오다가 2008년부터 소설을 본격적으로 쓰기 시작하면서 주변에서 이상한 일들이 발생하기 시작했다. 소설은 말 그대로 허구의 스토리나 이것저것 잡다한 조각모음을 통해 내용을 각색하여 완성하는 것인데, 너무 리얼하게 사실적으로 묘사하고 전개해서 그런지 구설수를 만드는 사람들이 많았다.
TV 탈렌트나 영화배우들 중 악역에 나오는 인물들이, 현실에서 공연히 주변 사람들에게 천덕꾸러기나 밉상취급을 받으며 오해받을 때가 많다고 한다. 심하면 린치를 가해올 때도 있다고 한다. 아무리 리얼하게 사실에 가깝도록 작품을 전개해 나가도 결국 소설은 허구일 뿐이다.
독자 제위 여러분께서는 너무 깊이 심취하여 소설과 현실을 착각해서 오해하는 일이 없었으면 한다. 그런 말이 있다. 소설가들은 숨 쉬고 밥 먹는 것 외엔 전부 다 가짜고 거짓말쟁이니, 사실 그대로 믿지 말라고들 한다. 그 말은 사실인 것 같다. 영화는 영화이고 소설은 소설일 뿐이다.
필자가 사회생활 중 다양한 경험을 한 것은 한 치도 틀림없는 사실이지만, 1998년 2월부터 근무했던 지금의 직장에 33살의 늦깎이 나이로 신규 입사하기까지, 여러 지역과 많은 직종에서 ‘아르바이트’로 일한 경험들이었다. 지금의 직장엔 33살의 나이에 신규직원으로 입사해서 지금까지 잘 근무하고 있는 중이다.
참고로, 본 저자는 노조나 노동운동과는 전혀 무관한 평범한 회사원(사무관리직)으로서, 오래전에 지극히 짧은 10개월간 노사문제에 살짝쿵 데이트(?)로 개입했던 일천한 경험이 있긴 하지만, 20년도 넘게 비조합원 생활을 해오는 중이다. 노사문제에 있어서는 그렇게 자세히 알 수는 없다.
오래전에 시민사회단체나 정치단체에도 지극히 짧은 1년여 기간 동안 참여하며 이런저런 사회문제에 관심을 가진 적은 있으나, 그것도 지금은 거리를 두고 직장 업무에 충실하고 있는 중이다. 게오르규의 〈25시〉처럼 굽이굽이 곡절 많은 시간들이 있었지만, 아무런 불만 없이 살아가며 그것도 소중한 경험이라 생각하고, 긴 호흡으로 하는 소설가로서의 삶을 행복으로 생각하며 지낸다.
― < 머리말>
과거는 역사(History)이고 미래는 신의 영역으로 미스테리(Mistery)에 해당한다. 신은 우리에게 ‘현재를 즐기라’며 오늘을 선물한 것이라고 한다. 그래서 현재를 선물이라는 뜻이 담긴 프리젠트(Present)라고 한다.
인간이 가진 원초적인 본능인 리비도(Libido)와 애로티시즘(Eroticism)을 전혀 추하지 않게, 굴풋한 젖내음과 해감내가 느껴지고 날비린내가 살아있게 표현해내려고 노력하였다.
시간여행을 통해 인간의 희로애락(喜怒哀樂)과 굴곡진 삶을 극복하는 역동성의 과정을 살려내어 삶은 결코 추하지 않으며, 아름답게 재창조될 수 있음을 나타내고자 하였다.
트라우마(Trauma)와 어두운 그림자에 잡아먹히지 않고, 힘 있게 삶에 대한 긍정성과 낙관적인 자세를 지향하여, 세상은 공정하고 공평한 것이 우주의 법칙이고 자연의 질서임을 드러내고 정리하였다.
인간의 심리를 분석하고 파헤쳐 적나라하게 표현하려고 애를 써 보았다. 어느 선까지 드러내고 정제해야 할 지도 치열하게 고민했었다. 소설의 일정 부분은 실화를 토대로 구성했지만, 등장인물의 명예를 고려하여 개인 신상이 노출될 수 있는 부분은 배제하였다.
흥미위주의 내용으로 각색하였으며, 등장인물은 가명으로 사용하였다. 소설이기에 허구의 내용이 많으므로 작품 내용과 현실에 오해가 없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내용에서 과거와 현재 또는 너와 나를 매개시키는 적용(Application)을 통해, 의사소통 행위(Communication action)의 기대를 근거로 하여 상징적으로 중재된 상호작용을 끌어올리려고 노력을 해 보았다.
인간 심리를 깊이 파헤친 소설이지만, 그 복잡함 속에서도 소통의 길을 찾아보려고 무던히도 애를 써 보았다. 일방적으로 주절거리는 만담 같은 이야기가 아니라, 막걸리나 소주 한잔 나누면서 하는 대화로 독자와 작가, 극중 인물들이 함께 동행했으면 더욱 좋겠다.
― <머리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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